Battersea Power Station

Workshop 장소에서 런던 중심부에 위치한 호텔로 가는 길은 무척이나 지루했다. 출퇴근 시간 서울 시내의 교통체증과 다를 바 없는.

무심하게 창밖을 보다 엄청난 크기의 구조물 – 주변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 을 보고 놀라서 운전사에게 물어보니 Battersea 화력 발전소라고 한다.

압도적인 건물 자체의 외관도 흥미롭지만, 음악 좋아하는 사람은 즉시 Pink Floyd의 ‘Pigs on the Wing’을 떠올릴 것이다.
수십년간 이 노래를 좋아해 오면서도 런던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이 건물을 찾아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LP로 음악 듣기

얼마전 ‘Vinyl로 음악을 듣는다는 것‘이란 글을 허핑턴포스트에서 읽었다.
근래 음악을 들으며 늘 무언가 아쉬웠는데, 바로 그것을 정확히 짚어주는 글이다. 아래는 그 일부.

… 음원과 스트리밍의 전성시대, 그 한복판에서 음악이라는 예술이 주는 궁극적인 감흥이란 폴더 안에 가득한 파일이나 음악 앱의 클릭 버튼이 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체감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어떤 음악에 매혹되는 첫 순간으로부터 시작해 물성을 지닌 음반을 구매하고 싶다는 욕구, 매장에 찾아가 직접 음반을 고르고 비교하는 행위, 음반을 손에 쥐고 집에 돌아와 비닐을 벗기고 부클릿을 읽으며 음악을 듣는, 이 모든 경험과 과정의 종합이야말로 음악과 진정으로 마주하는 짜릿한 ‘의식’임을 사람들이 알게 된 것은 아닐까. 누군가에게는 새롭고, 누군가에게는 다시 찾은, 그 감흥 말이다.

디지털 파일이 주는 극단의 편리함이 누적된 끝에 결국 물성을 동반한 불편함이 다시 각광받는 이 현상은 작용과 반작용, 혹은 시대는 돌고 돈다 따위의 말을 떠올리게 하다가 결국은 ‘음악을 듣는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한다. 스마트폰에 저장된 수만 개의 음원으로도 채워지지 않던 나의 음악적 허기는 이제 디지털인지 아날로그인지 모호한 시디 따위로도 채워지지 않는 대신, 그보다 훨씬 크고 구식인 바이닐을 턴테이블에 눕히고 애써 바늘을 올려 빨리 감거나 스킵을 할 수 없는 불편한 상황을 스스로 만든 다음에야 비로소 채워진다. 하지만, 나는 그래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덕분에 Mischa Maisky 연주, Bach의 ‘무반주 첼로 조곡’을 오랜만에 LP로 감상할 생각이 들었다.

음, 사실 이 연주는 상기한 글의 취지와는 거리가 있다. LP로 듣는 본 연주의 질감과 느낌은 CD로 재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Schubert의 Impromptus, Ingrid Haebler의 연주

Schubert의 Impromptus는 많은 명반이 있지만 난 Ingrid Haebler의 연주를 가장 좋아한다.
LP로 가지고 있어서 자주 손이 가지 않았는데, Amazon에서 그녀의 Schubert 피아노 소나타 & 즉흥곡 Box-set를 발견하고 너무나 반가왔다.

20140116_Klaviersonaten_Impromptus

곧장 주문하려 했으나, 얼마전 Ernest Ansermet의 Bach 연주를 십여년만에 다시 들었을 때의 괴리감이 생각났다.
정말 내가 Haebler의 연주를 가장 좋아하나, 하는 의구심이 들어 다른 유명 연주가들의 Impromptus를 쭉 들어보았다. YouTube로.
편한 세상이다.

명반으로 인정 받는 Kempff, Brendel의 연주도 훌륭하고, Zimerman의 따뜻함이나 Perahia의 번뜩이는 연주도 좋다. (단 만년의 Horowitz 연주는 공감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역시나 Haebler의 연주가 좋다. 그것도 훨씬.
곧장 주문했다.

아, 비슷한 느낌의 Maria João Pires 연주도 무척 좋다.
Haebler의 연주를 알지 못했으면 이 사람 음반을 구입했지 싶다.

Mike Oldfield, To France

오랜만에 Mike Oldfield의 ‘To France’를 들었다.

‘To France’는 기억의 패러독스에 관한 노래다. 프랑스인지 어딘지 모를 공간에 대한 아련한 기억들이 불려 나오지만, 화자는 당신이 결코 프랑스에 도착하지 못한다고 노래한다. ‘To France’는 기억을 판타지 혹은 꿈이라고 정의한다. 가보지 못한 곳, 그러나 머릿속에 남아 있는 기억의 정체는 무엇일까.

씨네21에서 읽은 글인데, 사실과는 좀 다르다. 이 노래는 스코틀랜드 메리 스튜어트 여왕에 대한 이야기다.
그녀는 어린 시절을 프랑스에서 보냈고, 프랑스 왕비가 된 후 곧 스코틀랜드 여왕으로 옮기게 된다. 스코틀랜드에서 그녀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아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려 했으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친척이 있는 잉글랜드를 택하게 되고, 종국에는 엘리자베스 1세와의 권력싸움에 말려들어 참수형을 당한다. 즉 노래처럼 she never got to France.

내용이야 어땠건 Maggie Reillys의 목소리는 정말 일품이다.
당연히 ‘Moonlight Shadow’도 다시 꺼내 들었다.

Brandenburg Concertos

처음엔 5번이 좋았다.
제일 유명하기도 하고, Harpsichord 소리가 듣기 좋았다.

다음엔 4번이 좋았다.
어디선가 시그널 음악으로 쓰인 탓에 선율이 낯익었고, 특히 이른 아침 새소리 같은 두 대의 Recorder 소리가 좋았다.

다음은 1번.
전곡 무한 플레이를 하게 되면 처음 재생되는 트랙이기 때문인지 많이 듣게 되었다.

요즘은 6번이 좋다.
치밀하면서도 부드럽고 박력있는 3악장 Allegro가 특히 근사하다.

20년 넘게 들으며 취향도 조금씩 바뀌어간다.

오늘 들은 음악 몇 가지

오랜만의 화창한 날, 휴가맞이 대청소를 시작했다.
음악이라도 들으며 할까 해서 YouTube의 즐겨찾기를 랜덤으로 재생했는데, 몇 번이나 청소는 잊고 멍하니 음악을 들었다.

Eva Cassidy – My Love is like a Red, Red Rose
스코틀랜드 민요인 이 곡은 십여년 전 ‘당신의 밤과 음악’이란 걸출한 컴필레이션 음반에서 Phil Coulter의 피아노곡으로 처음 접했다.
꽤나 다양한 버젼이 있는데 Phil Coulter의 연주곡을 뛰어넘는 곡은 듣지 못했다. Eva Cassidy의 이 곡을 듣기 전까지는.
아티스트의 죽음이 음악에 과장된 평가를 가져다 주고 이를 이용하는 상술은 흔하지만(특히 젊은 아티스트의 경우) Eva의 목소리는 정말, 정말 놀랍다.
이런 음악이 21세기에 크게 히트하는 것이 더 놀랍긴 하지만.

Adele – Someone Like You
생각해보니 Adele의 곡도 요즘 트렌드와는 거리가 있다.
작년 말 이 곡이 Billboard No.1을 차지했다는 사실에 정말 놀랐다.

Adele – Someone Like You from AdeleTurkey on Vimeo.(YouTube에선 MV 링크 막혀있음)

Chris de Burge – In Dreams
Roy Orbison의 곡이 오리지널이지만 가사의 애절함의 표현에 있어 Chris de Burgh의 리바이벌이 훨씬 와 닿는다.
언제 들어도 좋은 곡.

The Corrs – Long Night
노래할 때 Andrea Corr의 미모는 유난히 눈부시다. 특히 ‘So Young‘에서.
오늘은 ‘Long Night’을 들었는데, 곡도 좋지만 MV가 정말 근사하다.

그리고…

Wachet auf, ruft uns die Stimme by J.S.Bach for Organ & Guitar
얼핏 생각하기에 오르간에 비해 작은 크기와 음량의 기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기가 막히게 조화를 이루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앞서 Eva Cassidy 곡과 함께 무한반복한 곡.

추: Randy Vanwarmer 노래를 듣다가 그가 이미 고인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사인은 백혈병. 쉰도 안 되었는데, 안타깝다.

Pachelbel의 Canon, 눈으로 듣기

Pachelbel의 ‘Canon’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하지만 비전공자가 그 악보를 처음부터 끝까지 볼 일은 없을 듯 하다.

사실 Canon 형식 – 또는 대위법을 따르는 – 의 곡의 악보를 보면 제법 재미있다. ‘다같이 돌자, 동네 한바퀴’ 식의 돌림노래가 어떻게 기가 막힌 음의 조화를 이루는 지도 놀랍지만, Canon의 악보를 보면 각 성부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하나의 graphical한 패턴을 보여주는데 아주 근사하다.

아래 YouTube의 동영상을 보면 바이올린 3부와 콘티누오가 두 마디 간격으로 진행되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간단해서 보기도 좋다)
점차 세밀하게 나뉘어져 가는 윗 성부의 화려함도 좋지만, 그 화려함 뒤에 4/4박자의 콘티누오가 30회 가까이 묵묵히 같은 주제를 반복하는 것이 더 흥미롭고 믿음직스럽다. :-)

Palestrina, Sicut Cervus

지난 금요일 라디오(SWR2)에서 Palestrina의 ‘Missa de Beata Virgine’을 들은 뒤로 계속 르네상스 시대 음악에 꽂혀있다.

스스로를 ‘종교인’으로 분류하더라도 깊은 신앙심, 신실한 신앙생활과는 좀 거리가 있는 터라 종교음악을 들을 때에도 음악 자체에 관심이 있지 그 성격이나 배경으로 인해 큰 감흥을 느끼는 경우는 드물다.
“참된 종교는 인생과 세상의 신비를 대면하여 경외심을 느끼고 그 신비를 탐구하는 과정중에 생기는 것이다.”, “어느 한 종교가 종교적 진리를 독점할 수 없다.”고 말한 아브라함 헤셀의 말에 많이 공감하는 터이기도 하고.

한데, 오늘 Palestrina의 Motet ‘Sicut Cervus’을 듣고 완전히 압도되었다. 종교에 대한 수많은 갑론을박을 떠나… 이런 음악을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세상 어딘가에는 나를 사랑해주고 아끼는 신이 존재한다는 느낌이 든다.

Busoni plays Chaconne, Piano roll

단순작업 하며 들을 음악을 YouTube에서 고르다가 ‘Busoni plays Bach’란 컨텐츠를 우연히 발견했다.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인지라 흥미 발동하여 당장 들어보았다.

첫 소절을 듣자마자 fake란 생각이 들었다. Busoni가 사망한 것이 20년대 초인데 이 음질은 복원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알고보니 Piano roll을 이용하여 녹음한 것이라고 한다. (Busoni는 생전에 꽤 많은 Piano roll을 남겼다고 한다)
정말 놀랐다. 이렇게도 하는구나.

안타깝게도, 이 위대한 작곡가의 연주솜씨는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다 ㅎㅎ

많은 이들이 미켈란젤리Michelangeli의 연주를 극찬하지만, 개인적으론 라로차Larrocha의 1987년도 Decca 발매반에 수록된 연주에 비할 바는 아니라 생각한다. 라로차의 Chaconne도 YouTube에 올라와 있지만 다른 버젼인듯. (오히려 미켈란젤리 연주와 유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