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들어진 신

대학 시절 종교 때문에 방황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 한 은사님이 하신 말씀이,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것이 종교가 없는 것보다 당신을 더 행복하게 하더라는 것이었다. 깊게 와 닿은 말씀이었기 때문에, 이 후 종교에 회의가 들 때마다 스스로에게, 또는 다른 이에게 그런 식의 말을 하곤 했다. 그런데 이 책에서 도킨스는 버나드 쇼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자가 회의주의자보다 더 행복하다는 사실은 술 취한 사람이 멀쩡한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는 사실만큼이나 말이 안된다.

앞뒤 없이 이런 말만 듣게 된다면 그냥 냉소 정도로 치부하겠지만 이 책은 냉소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오히려 열정 – 신이 없다는 신념에 대한 – 이 가득하다.

이 책은 설득력이 있다. 한 명의 과학자로서 본인이 납득할 수 있는, 그럼으로써 남도 납득시킬 수 있는 사실과 증거에 기반하여 일관성 있게 논의를 진행하기 때문이다.
특히 와 닿는 것은 저자의 진정眞情이다. 미신이나 신화적, 또는 문학적 가치 이상을 부여하지 않는 종교에 대해 냉소를 던지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한 해악을 지적하고 그곳에서 빠져나오라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 이런 열정 때문에 ‘증거에 대한 과학자의 믿음 자체가 근본주의 신앙’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이 역시 그의 글에 언급되어 있다.

아마 과학자들은 ‘진리’라는 것의 의미를 어떤 추상적인 방식으로 정의한다는 점에서 근본주의자일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게 한다. 내가 뉴질랜드가 남반구에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할 때 근본주의자가 아니듯이 진화가 사실이라고 말할 때에도 나는 근본주의자가 아니다. 우리는 증거가 진화를 뒷받침하기 때문에 진화를 믿으며, 그것을 반증하는 새 증거가 나오면 단번에 그것을 버릴 것이다. 진짜 근본주의자라면 결코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근본주의와 열정을 혼동하기가 아주 쉽다는 것이다.

이 책에는 다양한 논리와 숱한 인용들, 인터뷰 등이 빽빽하다. 쉽게 읽히는 초반부와는 달리 중반부는 진도 나가기 조금 힘들었는데, 그래도 후반부, 특히 7장 ‘선한 책과 변화하는 시대정신’, 그리고 8장 ‘내가 종교에 적대적인 이유’는 굉장히 박진감 있다.
성서에 대한 비판의 경우, 상당히 구체적인 언급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설득력은 있지만 침소봉대針小棒大 한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을 듯하다. 잔가지를 보지 말고 성서의 중심된 내용을 보라는. 물론 저자는 그에 대한 반박도 하고 있다.

이런 좋은 원리들 중 일부는 경전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경전 속에는 올바른 사람이라면 따르고 싶어 하지 않을, 훨씬 더 많은 것들이 소개된다. 그리고 경전은 좋은 원리들과 나쁜 원리들을 구분하는 규칙을 전혀 제공하지 않는다.

8장과 9장을 읽을 때는 문득 ‘까라마조프의 형제’의 이반이 생각이 났다. 알료사와의 대화 – 영원한 조화의 대가가 너무나 비싸기 때문에 나는 그 입장료를 지불할 수가 없다고 한 – 에서 조화의 대가를 설명할 때 아이들의 비극을 예로 들었기 때문일 듯 하다. 도킨스는 보다 현실적인 입장이다.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이 말은 이슬람교뿐 아니라 기독교에도 적용된다) 진정으로 유해한 것은 신앙 자체가 미덕이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행위다. 신앙은 그 어떤 정당화도 요구하지 않고 어떤 논증에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악이다. 의문을 품지 않는 신앙이 미덕이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아이들 – 획득하기 어렵지 않은 다른 요소들을 고려할 때 – 을 미래의 성전이나 십자군 전쟁을 위한 치명적인 무기로 자라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다…

특히 9장의 ‘네 이웃을 사랑하라’ 편에 나오는, ‘여호수아서’에 나온 예리코의 전투에 대해 이스라엘 어린이 1000여명을 대상으로 직접 반응을 알아본 자료는 무척 섬뜩하다. 아이들에게 대량 학살을 비난하거나 용납하게 하는 등 견해 차이를 빚어내는 것이 바로 종교이기 때문이다.

20110212_god_delusion그가 기독교/카톨릭 신앙이 지배적인 곳에서 계속 살아가고 활동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노작勞作은 놀랍다. 그는 안정된 환경 속에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과학자로서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무신론자임을 알리며 종교가 사회에 끼치고 있는 해악을 열의를 가지고 고발하고 있다. 무척 존경스럽다.

이런 저런 이유로 두 번이나 책을 놓았다가 최근에야 겨우 다 읽을 수 있었다. 책을 읽는 도중 이 책의 출간 전 ‘Channel 4’에서 방영했던 ‘The Root of All Evil?‘을 보았다. (책에서 이 다큐멘터리의 많은 부분을 보다 상세히 만날 수 있다) 다큐멘터리를 먼저 보면 책을 읽는데 많이 도움이 될 듯 하다.

다음 번에는 자주 인용되는 버트런드 러셀 – p83에 나오는 찻주전자 우화는 아주 흥미롭다 – 의 글을 읽어 볼 생각.

비열한 시장과 도마뱀의 뇌

재테크를 위해 읽기 시작한 책이지만 그와는 별도로 이 책은 매우 구성이 짜임새 있고 일관성이 있다. 보통 이런 류의 책은 적잖은 집중력을 요하는데 덕분에 쉽게 사고의 흐트러짐 없이 읽어나갈 수 있었다.
또다른 이 책의 미덕은 흥미로운 예시와 은유, 그리고 유머가 가득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좀 지나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예를 들면 국채를 설명할 때,

두 사람이 구형 자동차의 부품을 찾기 위해 폐차장에 갔다. 폐차장은 매우 컸고, 폐차장 주인은 두 사람에게 직접 돌아다니면서 원하는 부품을 찾아보라고 했다. 동시에 폐차장 주인은 그의 애완용 염소를 주의하라고 당부했다.

두 사람은 돌아다니다가 땅에 있는 구멍 하나를 발견했다. 무심코 그 구멍에 돌을 차 넣었는데 놀랍게도 돌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자동차 부품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점점 더 큰 물체들을 그 구멍에 던져 넣었지만 여전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자동차 트랜스미션을 던져 넣었는데, 잠시후 염소 한 마리가 달려오더니 그 구멍 옆에 섰다. 그리고 구멍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놀라서 폐차장 주인에게 돌아가, 물건을 구멍에 던졌다는 이야기는 빼고 염소가 그 구멍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만 했다. 폐차장 주인은 “이상하네요. 내 염소는 자동차 트랜스미션에 단단히 묶여있을 텐데요.” 하고 말했다.

채권에 있어서 국채는 자동차 트랜스미션이고 다른 모든 채권은 염소다. 만약 국채의 가치가 떨어진다면 다른 모든 채권의 가치도 떨어진다.

흥미로운 책 제목의 일부 ‘도마뱀의 뇌’는 실제로 도마뱀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덜 인지되고, 덜 추상적인 정신 영역에 대한 함축적인 표현이다. 이 도마뱀의 뇌의 효과는 때로는 중립적이기도 하고, 정확한 해결책을 주기도 하며, 비합리적인 행동을 하게도 하는데, 이 각각의 효과는 어떠한 환경에 처해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불행히도, 금융시장은 도마뱀의 뇌가 최악의 결정을 내리게 하는 범주에 속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20110129_lizard_brains저질러지기 쉬운 저질판단을 피하기 위해 저자는 책의 말미에 8가지 법칙을 제시하는데 그 대부분은 – 예상하다시피 – 이미 잘 알려진 것들이다. 단지 객관적이고 알아듣기 쉬운 저자의 말솜씨 때문에 같은 말이라도 꽤 설득력을 지니는 것이 사실이다. 그 중 몇가지는,

  • 도마뱀의 뇌는 손실에 직면하면 더욱 비합리적으로 기승을 부린다. 손해를 보고 있는 주식들을 더 구입하지 마라. 평균단가를 올리는 경우에만 투자를 늘려라.
  • 정기 정액의 형태로 주식을 구입하지 마라. (이 규칙은 상기 규칙과 일맥상통한다. 즉 주식 시장이 하락세에 있지 않다는 비밀정보를 갖고 있지 않으면 이는 손해보고 있는 주식의 평균 단가를 낮추는 어리석은 선택이 되기 때문이다)
  • 투자 결정 시간에만 금융 관련 뉴스를 들어라.

등등.

하지만 상기 규칙들 보다는 P296에 나오는 “주식 매도의 윈-윈 형태는 비합리적 형태를 띤다”란 단락이 지금 나에게는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시지프의 신화, 내 마음의 옥탑방

20101221_rooftop_house먼저 ‘시지프의 신화’ 이야기부터.

카뮈의 말인즉, 인간은 결국 시지프와 같다는 것이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인간의 한계라고 느끼는 것을 그는 ‘숙명적 부조리不條理’라 인식하고, 그 한계 내에서 최대한 노력하는 자세가 인간성 즉 자신의 실존을 찾아가는 단계라는 것이다.

그의 다른 작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손을 쓸 수 없는 페스트가 만연해 있거나 끊임없이 강한 햇빛이 내리쬐고 있는 곳이 세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런 잘못 없이도 페스트에 걸려 죽을 수도 있고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살인을 할 수도 있다.

산다는 것은 바로 이런 부조리한 상황을 사는 것이다. ‘페스트’의 주인공들 같이 이런 부조리에 대해 도전하고 또 스스로의 한계까지 환자들을 도움으로써 자신이 살아있는 인간으로서의 자각을 하게 된다.

이번에는 ‘내 마음의 옥탑방’을 보자.

작가는 시지프의 신화의 인용을 통해 부조리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부조리를 가지고 사는 것이 삶임을 강조한다.

주어진 운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오히려 반항하는 신화 속의 시지프와는 달리 ‘내 마음의 옥탑방’의 ‘나’는 거세당한 시지프다. 더 이상 운명에 저항하지 않거나 아무것도 무릅쓰지 않는다. 나에게는 이 지상의 공간 자체가 인간의 온갖 ‘미물스러움과 속물스러움’이 편재하고 있는 죽음의 장소에 다름아니다. 그런 지상에 편입되지 못하기에 ‘나’는 이 지상에서 막연히 벗어나고 싶어한다.

이런 시지프들에게는 신화 속 시지프처럼 “찡그린 얼굴, 바위에 부벼대는 뺨, 진흙에 덮인 돌덩이를 멈추려고 버틴 다리, 바위를 받아 안는 팔, 흙투성이의 손”이 없다. 거세된 시지프들은 시체처럼 움직이지도 않고 ‘희망없는 도로(徒勞, 헛되이 수고함)’의 절망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이런 시지프들의 모습 자체가 바로 신들이 원하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이다. 더욱이 인간들은 더 이상 가해자인 신을 멸시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의 멸시”에만 몰두한다는 점에서 그 불구성은 극에 달하고 있다.

반면, ‘그녀’는 인간적인 타락일지라도 그것이 ‘인간의 속성’이라면 기꺼이 감내하려는 의지와 용기를 보인다. 그녀는 부조리한 세계를 명확하게 의식하면서 불가능한 탈출을 꿈꾸지 않는다는 점에서 진정한 시지프다…

… 라고 하지만, 단지 지상의 주민이 되어 그 속물스러운 세계에 안주하는 것이 지상명제라는, 세상을 착하고 올바르게 산다는 게 아무 의미 없다고 이야기 한다면 결과적으로 ‘나’의 삶이나 그녀의 삶 간에 무슨 차이가 있을 지 모르겠다.
단지 인식하고 못하고 차이일 뿐 어떤 의미있는 목적도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녀의 삶과 ‘나’의 삶은 일반 내시경과 수면 내시경의 차이 정도 밖에 보이지 않는다.

너무 일상적인 것에 거대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듯 보여 읽는 와중에 좀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몽블랑 만년필 케이스에 153 볼펜을 넣어둔 것 같다)

나사 그리고 거짓의 역사, Aliens in the NASA Archives

얼마 전 한국에서 가져온 ‘나사, 그리고 거짓의 역사’를 맹렬하게 읽고 있다. 600페이지가 넘는 두께에 빽빽하게 채워진 글씨에 처음엔 질렸는데, 의외로 굉장히 재미있다. 은폐된 진실을 드러낸다는 저자 입장에서 꽤나 쌓였던 것이 많았겠다 싶다.

마침 YouTube에서 아주 흥미로운 동영상을 발견했다. 앞으로 읽어갈 부분들 중에 이 동영상에 이미 언급된 내용이 꽤 있을 지 모르겠다.

NASA’s Alien Anomalies caught on film – A compilation of stunning UFO footage from NASA’s archives

Aliens in the NASA Archives – More Stunning NASA UFO Anomalies Captured On Film

맞벌이의 함정 – 엘리자베스 워런, 아멜리아 워런 티아기 저

저자는 파산 가정의 대부분이 맞벌이 가정이며 그 주된 원인은 가족의 ‘안전’과 ‘교육’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자녀를 가진 중산층이 어떤 식으로 재정 파탄의 위기를 겪게 되는가 등에 대한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하지만, 그 문제점들이나 해결책이 잘 알려진 것들이고 특히 미국 내 해당되는 것이 대부분인지라 개인적으로 큰 도움은 되지 못할 것 같았다.

단 해결책의 근본 중 하나가 교육제도의 개혁에 있고 그에 대한 몇가지 방법 – 그다지 설득력 있게 들리진 않았지만 – 을 제시한다는 점이 흥미로왔다. 미국 역시 교육과 집값의 함수관계가 큰 이슈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아래는 그중 일부 발췌한 내용들이다.

  • 학교체제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자 (좋은 학군 내) 주택에 대한 입찰경쟁이 격화되었다.
    무자녀 독신자의 83년 ~ 98년 주택가격 중앙값은 23% 상승, 그러나 유자녀 부부의 주택가격은 79% 올랐다. 이렇게 많은 돈을 쓰는 이유는 ‘안전’과 ‘교육’ 때문이다.
  • 전형적인 중산층 아동의 학교생활 기간 중 1/3이나 그 이상을 차지하는 프리스쿨(데이케어 센터와 다름)과 대학은 가정의 부담이다.
    15개 주에서 도시지역의 보육시설에 4살짜리 아이를 보내는데 드는 연간 비용이 대학 등록금의 2배가 넘는다.
  • 신용카드 채무는 68년 오늘의 화폐가치로 100억달러 미만이었던 것이 2000년에는 6,000억달러가 넘는다. 이는 휴가와 사치품 때문이 아니다. 앞서 말한 입찰전쟁은 중산층 가정이 모기지 대금과 기타 고정비용을 지출하고 나면 소득이 거의 남지 않을 정도까지 중산층 생활 비용을 높였다. 이때 안 좋은 일이 생기거나 여타 이유로 신용카드 채무에 의존하는 생활이 시작되고 이것이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 되면 이 모든 채무를 통합해 2차 모기지 대출을 받는다.
  • 파산한 가정은 확실히 과소비를 했고, 감당할 수 없는 의료치료를 받았으며, 집세를 낼 돈이 별로 남지 않도록 자녀양육비를 지출했다. 그들은 또한 실직 후에도 자신의 주택과 차를 지키려고 하는 등 자신의 소득능력 이상으로 생활했다.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년

꽤 구하기 힘든 책이었다만 운 좋게 읽을 수 있었다.

제목과는 달리, 줄거리에는 웅장한 구석이 눈꼽만치도 없다. 아마 영웅적인 베체로프스키가 ‘파미르’ 같은 곳으로 떠나면서 무언가 벌어질 지 모르겠지만, 이 소설은 그냥 베체로프스키 외 모든 인물이 ‘절대자’에게 굴복하면서 끝난다.

왠지 싱겁다 싶지만 베체로프스키가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년의 세월이 있어. 우리가 절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10억년 동안 많은 일들이,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하는 대목은 무척 매력적이다.

스뜨루가츠키 형제의 다른 소설 – ‘신이 된다는 것은 어려워’, ‘인간의 섬’ 등등도 읽어보고 싶은데 독일서 가능할 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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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밖에서

몇년전 조선일보 ‘Books’에 연재 되었던 칼럼 제목.

마침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년’을 읽은 참에, 지난 칼럼들을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밖에서’ 바로가기




음, 지금 보니 링크가 깨져있다.

조선일보 검색 페이지로 가서 ‘성밖으로’ 키워드로 검색, 듀나님의 글을 찾으면 된다. (검색결과가 그리 좋진 않지만)

— 2008/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