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시사회

이 책은 왜 우리 사회가 충동적이고 근시안적이 되었나에 대한 다양한 통찰을 준다.
미국의 사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요즘 트럼프 대통령 취임후 벌어지는 일들을 보며 지금이 바로 이 책을 읽기 적절한 시점이란 생각이 들었다.

먼저 1부에서는 왜 현대는 심각할 정도로 나 중심의 사회로 바뀌게 되었는지, 그리고 시장은 그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다룬다.

저자는 애플, 구글 등 개인용 첨단장비를 제공하는 업체들 대부분이 실제로 파는 것은 일종의 ‘생산성’, 즉 최소한의 노력으로 순간적 쾌감을 극대화하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이 생산성은 애덤 스미스나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생산성 – 기아와 빈곤을 해결하고 효용의 극대화를 통해 생존 능력을 높여준 것들 – 이 아니라, 개인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기제機制이다.
우리는 매번 생산성이 높아지기를 기대하며 새롭게 출시되는 제품을 빠르게 낚아챈다.
충동 사회의 핵심에 놓인 것은, 언제 어디서든 효율성과 생산성을 높이려는 이런 자동 반사적 행동이다.

이런 일련의 개인 욕망 추구는 소비자 경제가 점점 득세하면서 심화되기 시작한다.
한 세기 전에는 대다수 경제활동이 우리 ‘외부’의 삶에서, 즉 물리적인 ‘생산’의 세계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물건을 만들었고, 농사를 지었으며, 어느 정도 수량 예측이 가능한 재화와 서비스를 만들었다.
지금은 정반대로, 우리의 경제규모는 엄청나게 커졌지만 대다수 경제활동은 ‘소비’ 영역에 집중돼있다. (미국의 경우 70%) 이러한 소비활동은 상당부분 자의적이어서, 필요가 아닌 우리 내부의 열망과 바람, 정체성과 은밀한 갈망, 불안과 지루함이 소비를 끌어내게 된다.
시장은 점점 이런 자아와 통합을 이루게 되는데, 포화 상태의 산업자본주의 경제에서 모든 생산을 포용할 수 있는 것은 자아의 끝없는 욕망뿐이기 때문이다.

시장이 줄기차게 생산하면서 우리는 자아 표출이라는 힘에 상당히 다가설 수 있게 되었는데, 저자는 이러한 통합이 궁극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자아발견 및 정체성 탐구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에만 너무 몰두하면서 ‘장기적인 사회적 필요’는 충족시키기 힘들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건강보험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젠 사회적 목표나 책임감 같은 것은 제거하거나 최소화해야할 ‘비효율’로 본다. 당장의 이득에 비해 미래의 가치가 많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손익에 집착하는 추세는 우리가 2008년 금융위기로 인한 경기 침체에서 벗어나 유례없는 기업 이익을 거두게 된 이유를 설명해준다. 동시에 노동자와 지역사회가 유례없는 불안에 떠는 이유 역시 설명해준다.

즉 저자는 효율성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효율성 ‘이데올로기’를 비판한다.
‘언제나’ 최저 비용으로 최대 이익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믿음은 잘못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현재의 문화는 자아탐닉과 몰두를 어떤 치료가 필요한 인격적 결함으로 여기기는 커녕 하나의 라이프스타일과 ‘제품군’으로 칭송하고 정당화하고 있다.

2부 ‘깨진 거울’에서는 앞서 언급한 개인화의 문제를 다양한 측면에서 다룬다.

5장 ‘나홀로 집에’서 저자는, 사람들이 점점 자신의 취향에 맞는 공동체를 발견하기 쉬워지고 끼리끼리 모이면서 나라 전체의 사회적 결속을 떨어뜨린다고 지적한다.
이는 정치적 양극화의 심화로 이어지게 된다.

민주적 문화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계획에 없던 만남’에서 생기는 혼란과 어색함이 필요하다. 이런 만남에서 시민들은 ‘사전에 택하지 않은 것들 그리고 생각해 보지 않았거나 껄끄러운 주제 및 견해에 노출된다. 그렇지만 우리가 앞서 살핀 대로 계획에 없던 만남, 예기치 않은 생각들, 거슬리는 사람들은 우리가 맞춤식 삶과 경험에서 점점 걸러 내려는 대상들이다.


과거 미국인은 각자의 차이에 대처하는 법을 알았고 그러한 행동으로 공동체와 사회가 제 역할을 하고 온전히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공통분모를 지켰다. 그렇지만 지금은 의견을 수용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자아 표출 욕구를 침해하는 것으로 본다. 그저 나와 성향이 같은 사람들과 소통하거나, 내 생각과 맞는 아이디어나 관점을 고민하는 것을 더 편하게 여긴다.
그렇지만 이는 해로운 습관이다. 일단 현실 세계든 가상 세계든 나와 다른 사람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거리를 두기 시작하면 개별화 현상은 더욱 심해진다…
구성원의 생각이 비슷한 공동체는 더욱 극단적 성향을 띠면서 반대 의견을 잘 수용하지 못한다.

더 나아가, 소비자 경제에서 개인의 힘이 점점 커지게 되면 ‘동료와의 연대’조차도 딱히 유용하다고 보지 않게 된다.
이런 자기중심적 문화에 익숙한 시민들이 그림이나 시, 책을 접할 때 맨 먼저 던지는 질문은 ‘이 작품은 훌륭한가 저속한가’가 아니라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가’이다.

6장 ‘노동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는 매우 심각해지고 있는 고용 환경을 다루며, 7장 ‘질병으로 치료되는 사회’는 미국 의료보험 제도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설명해준다.
몇가지를 옮겨보면,

… 오바마케어는 1980년대에 사라져야 했던 뉴딜식 경제 관리 정책으로 복귀하기 위한 수십 년 만의 첫 시도였다. 더 근본적으로 우리는 오바마케어에 대한 반응을 보면서, 더 큰 사회 문제의 해결을 위해 개인을 희생한다는 소중한 관념을 다시 평가해야 했다. 일각에서는 자기중심적 이데올로기와 과민 반응하는 소비자 경제에 수십 년간 길들여진 결과, 희생적이지 못한 개인이 사회정의 실현에 결정적 장애가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 현재 미국 의료 제도의 경제적 기여를 평가할 때 치료 결과가 아닌 치료 행위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소위 ‘질병이 주도하는 경기회복’이라는 황당한 이야기가 나오게 된다.
경기를 자극하려면 사람이 아파야 하고 그래야 경기가 나아지기 때문이다.

이런 비관적이고 절박한 상황에 대항하여 저자는 몇가지 제안을 하게 되는데, 그 핵심은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몇가지 방안으로,

정부의 적극적 시장 개입
정부는 사회적/정치적 우선순위에 따라 경제의 사회적 산물을 이동시킬 수 있는 수단(조세, 보조금, 규제 등)을 갖추고 있다.
지난 40년 간 우리는 시장의 결정에 맡김으로써 갈수록 단기적이고 부당하며 지속 불가능한 결과를 선호하는 부패한 시장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정부는 보다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해야 하며, 이와 동시에 근본적으로 경제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경제적 우선순위와 그 가치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논의해야 한다.

시장과 거리 두기
우리는 제조업을 키우고 금융업을 줄이기 위해 온갖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금융 부문의 비대화가 낳는 실질적인 위험은 경제 변동성 같은 것이 아니라 금융 부문의 사고방식이 문화 전반에 침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금융시장의 대형 투자자들은 각종 대인관계 서적에서 경고하는 성품을 모두 갖췄다. 바로 충동적이고 단기적이며 헌신성이 전혀 없는 모습이다.
그런 금융이 노동시장과 경제에 과도한 영향을 주는 현실에서 우리는 만사를 시장에 맡기면 안된다.

직원 교육을 강화하고 은행을 쪼개기
노동은 단순한 ‘비용’이 아니다. 유럽처럼 직원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특히 이 모든 폐해의 중심에 있는 대마불사 은행들을 규제 가능한 더 작은 단위로 쪼개야 한다.

그밖에, 브랜드 정치를 지양止揚 하기, 끊임 없이 충동 사회의 패턴과 가치관을 밀어내고 내면의 소리를 듣기를 주장하며, 단기성과 이기심에서 벗어난 현실을 고려하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기를 강하게 권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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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1부: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시사 월간지 ‘밀레니엄’의 기자 미카엘은 거대 금융재벌 베네르스트룀의 음모로 곤경에 빠지게 된다. 이때 대재벌 방예르 가의 총수 헨리크 방예르가 미카엘에게 거액의 보수를 제안하며 방예르 그룹 내 감춰진 과거의 비밀을 조사해달라고 부탁한다. 천재 여성 해커 리스베트(사실 크래커에 더 가까운)가 합류하게 되면서 어두운 과거 뒤에 숨겨진 범죄가 점점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는 이야기인데, 흡입력이 굉장하다.

동시에, 이렇게 모든 등장인물이 비호감인 소설도 드문 듯 하다. 특히 주인공 리스베트와 미카엘은 감정적으로 상당히 불안한 인물들인데, 의례 화내야 할 일에는 침묵하거나 별 감정이 없는 반면, 특정 주제에 대해서는 비정상적으로 흥분하고 반응하는 식이다.
그외 인물들도 실제에서는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불편한 사람들이고.

이것때문에 읽으면서 종종 짜증날 때도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친 듯이 읽게 된 이유는, 낡고 색 바랜 과거의 미스테리를 첨단 디지털 방법과 구식 아날로그 방법으로 하나씩 풀어나가는 이야기의 흥미진진함 때문이다.
사실 범인이 누구냐보다, 막막하기만 한 수십년 전의 과거를 하나 하나 파헤쳐나가며 실마리를 발견해가는 모습이 훨씬 박진감 넘친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나서 스웨덴에 대한 묘한 선입관 생긴 것 같다.
별로 좋은 느낌은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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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비행사의 지구생활 안내서

우주비행사가 쓴 자기개발서라고 봐도 될 듯 하다.

‘발사 준비’, ‘이륙’, ‘지구 귀환’의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로켓 탑승 및 발사, 우주에서의 생활 등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은 대부분 2부, 3부에서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제목 그대로 ‘지구 생활’에 도움되는 이야기는 1부에 대부분 있다.

최초의 캐나다 출신 우주인으로서 그는 화려한 경력을 갖게 되었지만, 그를 비롯하여 모든 우주비행사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지상에서 ‘준비’하는데 사용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성공에 대한 그의 정의는 소박하기까지 하다.

나는 우주비행사라면 할 법한 일들을 하려고 쭉 노력했지만, 그렇다고 악착같이 훈련에만 매달리지는 않았다. 혹시라도 우주에 갈 경우에 대비하겠다는 결심만큼, 하루하루를 알차고 즐겁게 보내겠다는 마음도 똑같이 단호했다. 여태껏 내 선택으로 인해 불행하게 지내왔다면 난 결국 도중하차하고 말았을 것이다. 내게 고난을 무릅쓰는 순교자의 유전자는 없으니까.

우주비행에 나의 자존감이나 행복, 나의 직업적 정체성 따위를 걸지 않았기에 하루하루의 일상이 즐거울 수 있었다. 두번째 비행임무를 완수한 뒤 다시는 우주로 나가지 못할 거라는 말을 듣고 지상에 머물렀던 11년 동안이나.

내게 성공이란 예전이나 지금이나 (물론 대단한 성취감을 느끼는 일이긴 하지만) 로켓을 타고 우주로 날아오르는 것이 아니다. 성공은, 우주비행으로 이어지든 아니든, 예고되지 않은 기나긴 여정 내내 자신이 하는 일을 즐기는 것이다. 훈련을 더 높은 어떤 목표에 이르는 준비단계로 여겨서는 안 된다. 그 자체가 목적이어야 한다.

물론 이런 식의 견해는 진부하거나 소극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작가는 평생동안 이런 마음가짐으로 실천하고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충고는 매우 현실적으로 와닿는다.
지향하는 바가 비슷해서 더 끌리기도 하고.

인상 깊었던 대목 몇가지를 더 옮기면,

우주비행에서 ‘자세’는 방향성을 가리킨다. 태양과 지구 또는 다른 우주선의 위치와 견주어 나의 우주선을 어디로 향하도록 할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자세를 제어하지 못하면 두 가지 일이 생긴다. 우주선이 공중제비를 돌기 시작하면서 승무원들이 정위치를 벗어나고, 우주선 또한 올바를 경로를 이탈한다. 시간이나 연료가 부족할 경우, 이로 인해 생사가 갈릴 수 있다. 이를테면 소유스 로켓 안에서 우리는 모든 출처에서 단서(잠망경, 다중 센서, 지평선)를 이용하여 지속적으로 자세를 모니터링하고 필요하다면 조정한다. 자세 유지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 가장 기본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세를 잃지 않으려고 만전을 기한다.
내 경험상 이는 지구에서도 마찬가지다. 궁극적으로 내가 바라던 경력상의 목표에 이르렀는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 세상에는 내가 제어할 수 없는 변수가 수두룩하다. 하지만 단 한 가지는 내가 제어할 수 있다. 바로,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의 자세다. 자세를 통해서만 든든함과 안정감을 느끼며, 옳은 방향을 향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다.

— 2장, 자세를 유지하라

나로선 참 의아하다. 스승입네 하는 많은 이들이 사람들에게 승리의 모습을 눈앞에 그려보라고 강력히 권고하고는 거기서 끝인 것이. 어떤 이들은 좋은 일이 생기게 해달라고 오랫동안 열심히 기도하면 실제로 이루어지고, 반대로 부정적인 면에 집중하면 실제로 나쁜 일이 생긴다고 주장한다…
사실 문제를 예상해서 해결책을 찾는 것은 걱정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일, 즉 생산적인 일이다. 마찬가지로 행동계획을 내놓는 것은 마음의 평안을 주므로 시간낭비가 아니다. 일어나지 않을 일을 준비하는 것이더라도 그 일이 위험성이 매우 높다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 3장, 부정적 사고의 힘

사전계획은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사람들에게 내가 그들을 각별하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알리는 손쉬운 방법이다. 그때 그때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할 기회를 번번이 놓친다면, 언젠가는 아주 화려한 축배로 가장 소중하고 가까운 사람들의 지지와 성원에 감사를 표한다해도 통하지 않는 순간이 올 것이다…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우선해야지 내가 가족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를 가족도 알게 된다.

— 7장, 고요의 기지, 카자흐스탄

능력은 어느 정도 있지만 환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플러스인 사람이 결코 될 수 없다. 기껏해야 제로인 사람이다. 하지만 제로인 사람이 나쁜 건 아니다. 문젯거리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괜한 고생을 시키지 않을 만큼 유능하다는 뜻이다. 대단한 사람이 되기에 앞서 유능해야 하고 그 능력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증명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지름길은 없다.

‘제로’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아도 기회는 얼마든지 찾아온다… 자존감이 있는 사람이라면, 배의 조타를 맡든 노를 젓든 둘 다 똑같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법이다. 옷장을 정리한다고 해서 사람의 품격이 손상되진 않는다. 사실 그런 일도 즐기며 할 수 있다. 어떤 일로든 전체 임무에 이바지한다고 여긴다면 말이다.

— 9장, 목표는 제로

지금 그는 거창하고 눈부신 순간을 지나 사다리를 내려오고 있는 듯 하지만, 본인은 새로운 사다리를 오르기 위한 일련의 과정으로 생각하고 있다.

새로운 사다리를 오르기 위한 준비라는 말에 최근 나의 상황을 돌아보면서 깊은 공감대를 느낄 수 있었다.
작가의 말처럼, “날마다의 행동이 내가 어떤 사람이 될지를 결정하겠지.”

20170121_우주비행사의 지구생활 안내서

7년의 밤

정말 오랜만에 읽은 한국소설.

서스펜스 소설이라 하기엔 일견 단순한 줄거리에 등장인물도 많지 않지만, 각 인물의 복잡다단한 감정선의 묘사나 잘 편집된 영화를 보는 듯한 서술은 소설에 굉장한 흡입력을 부여한다.
이 때문인지 너무 감정이입이 되어 버려서 소설 초중반에 나오는 세령의 학대, 그리고 죽음 장면은 읽기 너무 힘들었다. (거의 읽는 것을 포기할 뻔 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종종 최선이 아닌, 결과적으로 최악이 되는 그런 선택들을 하게 된다.
그 이유들은 결코 단선적이지 않은데, 우리네 현실에서 매순간 일어나는 선택들 역시 그러하다는 점에서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특히 최현식과 강은주, 두 인물에 대해서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나라면 과연 다른 선택을 했을까 하는.

또한 유약함과 소심함으로 인해 결국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최현식이라는 인물에게 있어서 절대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부성애였다는 점에서, 소설 마지막 페이지의 플래시백 장면은 한참을 가슴 먹먹하게 만들었다.

아쉬운 점이라면, 사족처럼 보이는 영재의 어린 시절 이야기보다는 차라리 은주의 마지막 장면이나 딸을 버리고 떠난 하영의 결정 등이 더 설득력있게 서술되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잘 짜여진 구성, 무엇보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문체의 힘이 큰 소설인데 이를 영화화한다니 기대반 우려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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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지코믹스

논리학을 좋아하지 않는다 – 라기보다, 논리학이라는 학문을 잘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시간을 투자하기도 망설이기 때문에 이 책을 읽은 것은 순전히 ‘버트란드 러셀’이란 인물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예전에 읽었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나 ‘러셀의 찻주전자’ 비유 등을 통해 항상 관심을 가졌던 인물인 반면 별로 아는 바가 없었는데, 이 책으로 많은 흥미로운 사실들을 알 수 있었다. 말로만 듣던 19, 20세기의 위대한 사상가들을 일부 경험할 수 있다는 덤도 얻었고.

책의 주인공들은 ‘지도 제작자’로 비유된다.
주인공들은 혼란스러운 실재를 명확한 지도로 환원하려 했다. 즉 실재를 더 단순한 것들로 대체함으로써 논리학이 더 자연스럽게 적용되도록.

그런 면에서 일견 논리학은 매력적인 학문으로 보일지 모르겠으나, 책을 읽고난 후에는 어지간한 광기 없이는 엄두도 못 낼 학문으로 생각이 되었다.
현실은 복잡하기 이를데 없고 모순 덩어리인데 그런 현실에 대해 논리를 기반으로 하는 ‘지도’를 만드려는 과정 자체가 불가능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러셀의 경우 그의 독특한 성격, 불안정성, 신경증이 그를 논리학으로 이끌었으며, 프레게, 러셀, 화이트헤드 역시 훌륭한 학자들이었지만 결국 그들 모두는 실제와 지도를 혼동했는지도 모른다고 작자는 말한다.
예를 들어 교육자로서 비트겐슈타인은 권위와 규칙을 강조한 반면 러셀은 권위에 철저히 반대했다. 하지만 그런 고집으로 그들 둘 다 현실에서 교육자로 성공하지 못했다.
논리학자의 이런 면들은 가족들 역시 불행하게 만들었는데, 러셀의 아들은 정신분열병 진단을 받았고, 손녀는 자살했다. 힐베르트의 아들도 15살때 정신병원으로 보내졌는데 힐베르트는 단 한 번도 아들을 그 후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나로서는 그런 위대한 논리학자들에게 완전히 공감하기는 어려운 점이 많다.

조만간 ‘행복의 정복’을 읽을 생각인데, 러셀이 어떤 관점에서 저술하였는지 궁금하다.
현실을 배제하고 논리적으로 접근한다면 말 그대로 현실성 없는 공허한 글이 될 것이며, 그렇다고 논리학자로서의 본인의 색깔을 완전히 뺀 채 접근한다면 과연 그 저작이 구닥다리 자기개발서 이상의 것이 될 수 있으려나 싶어서 읽기 주저하게 된다. (그래도 책은 사놓았다)

이 책에는 러셀 말고도 많은 흥미로운 인물들이 등장한다.
가장 인상 깊은 인물은 비트겐슈타인이었지만, 괴델 덕분에 오히려 다음에 읽고 싶은 책은 더글라스 호프스태터의 ‘괴델,에셔,바흐’다. 이번엔 원서로 도전할 생각이다.

나는 한 번 읽은 책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다, 카바사와 시온

이런 류의 책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제목이 항상 마음 속에 가지고 있던 바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바람에 읽기 시작했다.

늘 곁에 둘 필요는 없지만 습관이 생길 때까지는 종종 펼쳐 볼 것 같다.

아래는 그 요약.

독서법 기본 원칙

  1. 1주일에 3회 아웃풋하면 기억에 남는다. 아웃풋 방법은 아래 ‘독서법 키워드’를 참조하도록.
  2. 틈새시간을 활용한다. 특히 ‘오늘 이 책을 다 읽어야지!’라고 목표를 설정하고 제한 시간을 두면 긴박감으로 인해 집중력이 높아지는 동시에 기억과 관계된 뇌 신경전달물질인 노르아드레날린이 분비되어 책 내용이 기억에 잘 남는다.
  3. 심독深讀하자. 즉 책을 읽은 후 내용을 설명할 수 있고, 내용에 대해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

독서법 키워드

  • 형광펜 독서법: 책은 지저분하게 읽자. 형광펜과 볼펜을 사용하고 접착 메모지도 사용한다. (박웅현의 ‘책은 도끼다’에서(5P) 독서 후 정리했다는 그의 프린트물이 생각났다) 글자를 읽을 때 사용되는 뇌 부위와 펜을 잡고 줄 그을 때 사용되는 뇌 부위가 전혀 다르고, 글자를 쓸 때도 다른 뇌 부위가 사용된다. 결과적으로 뇌의 여러 부위를 사용함으로써 뇌가 활성화된다.
  • 홈쇼핑 독서법: 읽은 책을 많이 이야기하고 추천하라.
  • 소셜 독서법: 두세 줄만 간단히 Facebook에 쓰려 해도 책 내용을 다시 떠올려야 하기 때문에 기억이 복습되며, 3번의 아웃풋 가운데 여기서 1번의 아웃풋이 완료된다.
  • 리뷰 쓰기 독서법: 책을 심도 있게 소개하고 싶을 경우 상세한 ‘서평’ 또는 ‘리뷰’를 쓴다. 단, 객관적인 문장을 위해서 책을 읽은 당일이 아닌 다음 날 이후에 쓴다.
  • 집중력 최대 시간 ’15분’을 잘 활용한다.
  • 자기 전 독서는 기억에 남는다. 취침전 독서를 통해 몸과 마음의 긴장을 풀어주거나, 잠들기 전 어떤 문제를 생각한 뒤 ‘아침에 눈 뜨면 해결책이 떠오를 거야!’라고 염원하고 자면 실제로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아이디어가 떠오르기 쉽다.

독서법 실천편

  • 목차를 스윽 한 번 훑어본 후 책장을 훌훌 넘기면서 전체를 파악한다. 그런 다음 그 책을 읽는 목적을 정한다. 그 책에서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 그 책에서 무엇을 알고 싶은지를 정하는 것이다.
  •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페이지로 곧장 이동해서 먼저 읽는다. (목차를 이용한다) 그 페이지를 읽은 후 더 알고 싶은 곳, 더 깊게 파고들고 싶은 곳, 의문이 느껴지는 곳이 있으면 다시 목차를 확인한 후 그 페이지로 옮겨가서 읽는다. 여기까지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는다. 이렇게 가슴을 뛰게 만드는 지적 호기심을 채우면 도파민의 분비를 촉진하기 때문에 기억에 잘 남는다. 전체상을 대강 파악하면 첫 페이지로 돌아가 거기서부터 다시 읽어나간다. 이미 전체상을 파악했기에 글쓴이의 논지가 잘 보일 것이다. 이때는 처음부터 한 글자 한 구절씩 읽는 데 비해 읽는 속도가 압도적으로 빨라진다.

우연

원철 스님의 ‘집으로 가는 길은 어디서라도 멀지 않다’ 중 ‘매화 한 송이가 전하는 화두’ 편을 보면 꽃이 피길 기다릴 것이 아니라 꽃피는 곳까지 먼저 찾아가겠다고 길을 나서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온다.
같이 시작한 ‘책은 도끼다’를 읽다 보니 정확히 그 이야기가 원문과 함께(중국의 옛 시) 소개되어 있었다.

얼마 전부터 다시 ‘듣기’ 시작한 영화 ‘Stranger than Fiction’은 작가가 Writer’s Block에 빠지면서 이야기가 전개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오늘 들은 빨간 책방의 오프닝도 Writer’s Block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더라도 이렇게 특별한 우연은 나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로 모든 것이 서로 단단히 묶여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김영하 작가 인터뷰 기사에서

김영하 작가 인터뷰 기사를 꽤 재미있게 읽었다.

‘연결’을 생각한다 – 산문집 <보다> <말하다> <읽다> 연작 출간한 소설가 김영하를 만나다

특히 ‘작가’에 대해 말한 부분은 맘에 들어서 아래 옮긴다.

‘펜이 아닌 주먹을 쥔 작가’라는 수식도 따랐죠. 현실참여형 작가라는 타이틀이 부담스럽지는 않나요.

— 처음에는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도 있었어요. 일종의 ‘공(公)생활’이 된 것. 그런데 이제 작가에 대한 정의를 바꾸고 있어요. 옛날에는 작가란 ‘소설을 생산하는 사람’이었죠. 자동차 만드는 사람, 요리 만드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처럼요. 그런데 이런 직업의 정의는 20세기 것이에요. 무얼 만드는 사람이냐의 기준으로 직업을 분류한 거죠. 요즘은 좀 달라요. 소설가는 소설을 생산하는 사람이 아니라 문학적 경험을 독자들에게 제공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이렇게 정의를 하면 할 수 있는 역할이 늘어나요. 소설 쓰는 일도 하지만 강연도 할 수 있고 낭독도 가능한 거죠. 팟캐스트를 진행해 귀로 듣는 소설을 경험하게 한다든가, 독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도 이런 일의 일환이고요. 이런 활동을 주저하는 작가들도 여전히 있는데 전 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작가들이 골방에서 원고 쓰고 출판사에 책 보내면 출간되는 시절은 모든 게 잘 돌아가던 시절이었죠. 이번에 <읽다>를 쓰면서 문학사를 정리하는 글을 쓰다보니 예전 작가들의 형태가 새삼 와닿더라고요. 셰익스피어도 극장주라 장부 들고 손익을 따졌어요. 그러면서 글도 쓴 거고요.

문학과 소설가의 정의가 이제 더 포괄적인 시대가 된 거군요.

— 문학이라고 생각한 것만 문학이 아니고 문학적인 것도 문학이라고 생각해요. 문학적인 것을 발견하는 건 앞으로 더 중요해질 것 같아요. 동시에 읽기나 독서도 재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독서 캠페인이 있지만 지식을 가져오기 위한 수단이 앞서죠. 저는 그런 정의가 바뀔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책 속에 길이 있다거나 책은 마음의 양식이다 같은 지식의 저장 수단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위한 독서, 정신적 모험을 위한 독서 등 다양한 방식이 필요하다고 봐요. 사실 지식을 주는 수단이 지금은 인터넷으로 넘어갔으니, 오히려 독서는 더 다양한 지점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거죠.

세 잔의 차, 무슬림의 반테러 노력에 대한 기사

지금 읽고 있는 ‘세 잔의 차’의 주인공 그레그 모텐슨은 90년대 중반부터 히말라야 오지 및 시골마을에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짓는데 헌신하는 사람이다.

파키스탄, 북인도, 아프가니스탄 지역이 주 활동지인지라 다양한 무슬림들과 동고동락하며 그들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고국(미국)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데에도 주력하는데, 그 가장 큰 계기는 9.11 이다.

책에 보면 시아파 종교 지도자인 사이드 아바스가 9.11 직후 초등학교 개교식 연설에서, 자기네 대부분은 테러범이 아니라 선량하고 소박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강하게 언급하는데, 이에 대해 그레그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 사이드 아바스가 말을 마쳤을 즈음에는 모두가 울고 있었습니다. ‘이슬람’과 ‘테러범’이 같은 말이라고 생각하는 미국인들이 그날 그곳에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이슬람의 진정한 핵심은 정의와 관용, 사람입니다.”

유럽지역에 거주하면서 많은 무슬림을 만나지는 못했더라도, 내가 만난 이들은 모두 멀쩡한, 오히려 보통 이상으로 차분하고 겸손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언론의 편파 보도를 보다 보면 수억명의 이슬람교도들이 모두 잠재적인 테러범인양 비추어지기도 하는데, 말도 안되는 소리다.
누구를 바보로 아나.

이런 편파성에는 넌더리가 나던 참에 단비 같은 기사를 읽었다.

왜 주요 언론들은 무슬림의 반테러 노력을 보도하지 않는가


비평가나 언론이 “왜 무슬림들은 테러에 대응을 안 하나?”라고 묻지만 사실 성하 칼리파는 그들이 걱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성과를 달성했다. 비평가들을 비롯한 다른 단체들은 칼리파가 10년 넘게 칼리파 역할을 하며 외쳐온 반테러 목소리를 무시해왔다. 반면 IS의 리더 알 바그다디가 이슬람과 폭력에 대해 근거 없이 말한 한마디에 지난 6개월 동안 하루종일 뉴스 보도가 이어졌었다.

이러한 이중잣대는 정말로 지겹다.

혹시 내가 이제까지 잘못 생각했던 것일까? 무슬림의 외침을 주요 언론과 비평가들이 못 듣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이 ‘위협적이거나 독설적일 때’만 들리는 것일 수 있다. 그들이 말하는 이타심, 연민, 사랑, 관용, 다원성 같은 긍정의 내용은 무시되는 것이다.

평화를 지향하는 무슬림은 IS만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비평가와 언론의 존재를 위협한다.

상기 번역된 기사보다는 원문 쪽에 훨씬 많은 피드백이 걸려있다.
이 피드백들 역시 많은 생각의 여지를 준다.

브레이크아웃 네이션

엄청나게 다양한 시각을 제공하는 책.
내가 몰랐던 것, 잘못 알고 있던 것에 대한 각 국가의 ‘생생한’ 정보를 흥미롭게 제공한다.

작가가 차기 기대주로 뽑는 국가는 한국, 체코 / 터키, 폴란드(좀 위태롭지만) / 태국, 중국 / 인도네시아, 필리핀, 스리랑카, 나이지리아 등 (1인당 국민소득으로 크게 구분함) 이며, 그 반대로서 인도, 러시아, 브라질은 상당히 비관적, 특히 베트남과 헝가리에 대해서는 절망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굳이 경제에 대한 이해, 투자 만을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끊임없이 참조할 가치가 있는 책이지만, 철저히 경제 성장이 중심으며 그 외의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런 작가의 관점 때문인지 한국에 대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칭찬하는 것이 의외로 좀 불편함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