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레인코트

1995년에 출판된 책이지만 우리나라에는 최근에야 소개되었다. 급변하는 현 대상을 반영하기에 좀 오래되지 않았나 싶지만 내용을 읽으면 당시의 우려상황이 지금이라고 별로 나아진 건 없지 않구나, 하는 씁쓸함이 든다.

이 책은 역설Paradox로 인한 다양한 혼란을 언급하면서 시작한다. 예를 들어 ‘시간의 역설’을 보면,

조직은 적은 수의 사람이 긴 시간 일하기를 바란다. 그래야 총경비를 절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노동자들은 더 많은 액수의 임금을 원한다. 이로 인해 노동과 소비 사이에 은밀한 고리가 생겨난다. 사람들이 소비를 통해 만족감을 얻고 심지어 삶의 의미까지 찾으면서 점점 더 소비를 추구하는 것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사람들은 향상된 생산성으로 인한 혜택을 시간이 아닌 돈으로 돌려받자고 작심한 듯 하다. 노동과 소비는 일종의 습관이 되었다. 하지만 일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영국의 경우 수백만 가구가 시간외 근무나 부업으로 겨우겨우 생계를 꾸려나간다.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 겨우겨우 수지를 맞추기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내놓는다.

‘정의의 역설’ 부분도 흥미로운데,

자본주의는, 가장 성공한 사람이 가장 많이 가져야 한다는 분배정의의 첫번째 정의定義에는 비교적 충실하다. 그렇다고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사람의 욕구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반대 주장을 무시하면 신뢰를 잃고 내쳐질 것이다. 자본주의는 불평등을 근본 원칙으로 한다. 나보다 잘하는 누군가가 반드시 존재하게 마련이니까. 하지만 민주사회에서는 구성원의 대다수가 ‘남보다 잘하는 불평등’을 꿈꿀 동등한 기회를 가질 때만 장기적으로 그런 정의가 용인된다. 이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역설이다.

이런 역설적인 상황은 점점 더 심화될 것이기 때문에 이를 이해하고 ‘균형’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3가지 원리로 1. 시그모이드 곡선, 2. 도넛 원리, 3. 중국식 계약을 언급하는데, 우선 시그모이드 곡선이란 삶을 시그모이드 곡선에 비유하여 하향곡선 부분에 이르기 전 새로운 곡선을 시작하라는 것이다. 도넛 원리는, 우리의 일은 반드시 해야하는 핵심과, 우리가 나름의 변화를 시도하고 의무라는 틀을 넘어 온전히 잠재력을 발휘하는 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회의 영역, 이 두가지가 있고 이 둘의 균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 중국식 계약이란 다른 의미로 ‘타협’을 말하는 것이다. 아래 본문을 보면,

혼란의 시대에 우리가 직면한 딜레마의 대부분은 옳고 그름을 가리기가 간단치 않다. 타협은 약함의 표출인 그런 딜레마가 아니라, 옳은 것과 옳은 것이 충돌하는 훨씬 복잡한 딜레마들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일에 많은 시간을 쏟으면서 동시에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거나, 공동체의 훌륭한 구성원 노릇을 하면서 동시에 상당한 이익도 내고 싶다거나, 아랫사람들을 믿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이 하는 일을 파악해야 한다거나 집단과 집단의 이익이 충돌하는 경우라면 타협 없이는 아무런 진전이 있을 수 없다. 양쪽 모두 양보를 거부함으로써 정체가 불가피하다.

결국 이 책은 내가 늘 고민해오는 ‘균형 맞추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크게 새로운 내용은 없더라도 줄 쳐가며 읽을 많은 좋은 글귀들이 있다.

기아飢餓에 관한 짧은 대화

점심식사 후 동료 C와 산책을 하던 중 ‘기부’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내 스스로도 아이를 가진 후에야 기부에 관심을 갖고 시작한 터라 그리 할 말이 많진 않았지만 이 친구의 생각, 특히 기아에 대한 태도는 나를 경악하게 했다.
말인즉, 자기는 기부를 전혀 하지 않고 할 필요도 못 느낀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자신들 상황도 모른 채 무분별하게 많은 아이를 낳고 있는데 문제가 있다, 결국 자연은 점점 높아지는 지구의 인구밀도를 컨트롤하고 있는 것이다, 등등.
본인이 깨닫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이 친구는 멜서스의 주장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부터 시작해서 조목 조목 반박을 해주고 싶었지만 대화는 거기까지, 다시 일을 해야 했다.

기아에 있어서 문제는 식량의 부족이 아니라 배분, 즉 구조적인 것이다. 이런 근본 문제에 대한 이해는 뒤로 한 채, 자연도태설 – 강한 자는 살아남고 약한 자는 죽는다는 – 을 꺼리낌없이 이야기하는 데에서 무의식적인 인종차별주의를 느낄 수 있었다. (이 친구는 악한 사람이 아닌, 평범하고 조용한 독일 직장인이다)

한때 같이 일하던 영국인 동료가 ‘나는 독일인들만큼 인종주의를 강하게 표출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다’라고 말한 기억이 난다. 그렇게 극단적인 말은 말고라도 가끔 독일인들이 인종차별적인 말에 상당히 둔감하다는 것은 느낀다. (서구 외 지역에 대한 무관심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에겐 농담거리나 무관심의 대상일지 몰라도 상대편은 심각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엔 너무 잘 난, 그런 나라에서 살고 있는 지 모르겠다.
이럴 땐 이런 곳에서 애 키우고 살아야하나 싶다.

피아니스트 윤효간 씨 인터뷰 중

지난 1월 15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윤효간씨 인터뷰 중에서.

유명 가수들 세션맨으로 크게 성공했다. 왜 그만 뒀나.
– 이제는 나만의 음악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 솟구쳤다. 나이 마흔이면 누군가의 뒷자리에서 나올 때도 되지 않았나. 말리는 사람 많았다. 겁도 주더라. 하지만 2루로 나가려면 1루에서 발을 떼어야 했다.

만들어진 신

대학 시절 종교 때문에 방황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 한 은사님이 하신 말씀이,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것이 종교가 없는 것보다 당신을 더 행복하게 하더라는 것이었다. 깊게 와 닿은 말씀이었기 때문에, 이 후 종교에 회의가 들 때마다 스스로에게, 또는 다른 이에게 그런 식의 말을 하곤 했다. 그런데 이 책에서 도킨스는 버나드 쇼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자가 회의주의자보다 더 행복하다는 사실은 술 취한 사람이 멀쩡한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는 사실만큼이나 말이 안된다.

앞뒤 없이 이런 말만 듣게 된다면 그냥 냉소 정도로 치부하겠지만 이 책은 냉소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오히려 열정 – 신이 없다는 신념에 대한 – 이 가득하다.

이 책은 설득력이 있다. 한 명의 과학자로서 본인이 납득할 수 있는, 그럼으로써 남도 납득시킬 수 있는 사실과 증거에 기반하여 일관성 있게 논의를 진행하기 때문이다.
특히 와 닿는 것은 저자의 진정眞情이다. 미신이나 신화적, 또는 문학적 가치 이상을 부여하지 않는 종교에 대해 냉소를 던지는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한 해악을 지적하고 그곳에서 빠져나오라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 이런 열정 때문에 ‘증거에 대한 과학자의 믿음 자체가 근본주의 신앙’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이 역시 그의 글에 언급되어 있다.

아마 과학자들은 ‘진리’라는 것의 의미를 어떤 추상적인 방식으로 정의한다는 점에서 근본주의자일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게 한다. 내가 뉴질랜드가 남반구에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할 때 근본주의자가 아니듯이 진화가 사실이라고 말할 때에도 나는 근본주의자가 아니다. 우리는 증거가 진화를 뒷받침하기 때문에 진화를 믿으며, 그것을 반증하는 새 증거가 나오면 단번에 그것을 버릴 것이다. 진짜 근본주의자라면 결코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근본주의와 열정을 혼동하기가 아주 쉽다는 것이다.

이 책에는 다양한 논리와 숱한 인용들, 인터뷰 등이 빽빽하다. 쉽게 읽히는 초반부와는 달리 중반부는 진도 나가기 조금 힘들었는데, 그래도 후반부, 특히 7장 ‘선한 책과 변화하는 시대정신’, 그리고 8장 ‘내가 종교에 적대적인 이유’는 굉장히 박진감 있다.
성서에 대한 비판의 경우, 상당히 구체적인 언급을 하고 있기 때문에 설득력은 있지만 침소봉대針小棒大 한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을 듯하다. 잔가지를 보지 말고 성서의 중심된 내용을 보라는. 물론 저자는 그에 대한 반박도 하고 있다.

이런 좋은 원리들 중 일부는 경전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경전 속에는 올바른 사람이라면 따르고 싶어 하지 않을, 훨씬 더 많은 것들이 소개된다. 그리고 경전은 좋은 원리들과 나쁜 원리들을 구분하는 규칙을 전혀 제공하지 않는다.

8장과 9장을 읽을 때는 문득 ‘까라마조프의 형제’의 이반이 생각이 났다. 알료사와의 대화 – 영원한 조화의 대가가 너무나 비싸기 때문에 나는 그 입장료를 지불할 수가 없다고 한 – 에서 조화의 대가를 설명할 때 아이들의 비극을 예로 들었기 때문일 듯 하다. 도킨스는 보다 현실적인 입장이다.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이 말은 이슬람교뿐 아니라 기독교에도 적용된다) 진정으로 유해한 것은 신앙 자체가 미덕이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행위다. 신앙은 그 어떤 정당화도 요구하지 않고 어떤 논증에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악이다. 의문을 품지 않는 신앙이 미덕이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아이들 – 획득하기 어렵지 않은 다른 요소들을 고려할 때 – 을 미래의 성전이나 십자군 전쟁을 위한 치명적인 무기로 자라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다…

특히 9장의 ‘네 이웃을 사랑하라’ 편에 나오는, ‘여호수아서’에 나온 예리코의 전투에 대해 이스라엘 어린이 1000여명을 대상으로 직접 반응을 알아본 자료는 무척 섬뜩하다. 아이들에게 대량 학살을 비난하거나 용납하게 하는 등 견해 차이를 빚어내는 것이 바로 종교이기 때문이다.

20110212_god_delusion그가 기독교/카톨릭 신앙이 지배적인 곳에서 계속 살아가고 활동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노작勞作은 놀랍다. 그는 안정된 환경 속에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과학자로서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무신론자임을 알리며 종교가 사회에 끼치고 있는 해악을 열의를 가지고 고발하고 있다. 무척 존경스럽다.

이런 저런 이유로 두 번이나 책을 놓았다가 최근에야 겨우 다 읽을 수 있었다. 책을 읽는 도중 이 책의 출간 전 ‘Channel 4’에서 방영했던 ‘The Root of All Evil?‘을 보았다. (책에서 이 다큐멘터리의 많은 부분을 보다 상세히 만날 수 있다) 다큐멘터리를 먼저 보면 책을 읽는데 많이 도움이 될 듯 하다.

다음 번에는 자주 인용되는 버트런드 러셀 – p83에 나오는 찻주전자 우화는 아주 흥미롭다 – 의 글을 읽어 볼 생각.